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정병치료기/일기장

별거에 다 예민한 내가 싫다

by 내면고고학자 2023. 11. 17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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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부모님의 걱정에 걱정을 얹는 순간들

 

나는 부모님과 한 층 사이를 두고 같은 건물에 살고 있다. 내가 밥을 해 먹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아빠는 자꾸 밥을 먹으러 오라고 전화하신다. 그 전화가 감사하지만 사실 요즘은 버겁다. 정확히는 아빠가 내 삶에 걱정을 얹는 게 너무 힘들다. 할 일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상황에서 나는 특히나 이런 것들을 감내하기가 너무 힘들다. ADHD인 내게 하루를 관리하는 업무란 너무 힘든 과업인데, 자꾸 밥 먹을 시간을 조정해서 업무의 흐름을 끊고 그 시간대가 되면 밥을 먹으러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신경을 쓰게 하는 게 너무 힘들다.

 

근데 또 거절을 하기가 어렵다. 아빠의 걱정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니, 그걸 거절하는 게 뭔가 죄악을 저지른 것만 같기 때문이다. '너 상대방의 사랑과 관심을 이렇게 니 패턴에 안 맞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할 수 있는 거야?'라는 질문을 전화가 올 때마다 느낀다. 그리곤 결국 밥을 먹으러 가서 업무의 흐름을 망치고, 패턴을 자주 망치곤 한다. 근데 사실 이러면서도 나에게 '너 그냥 네가 게을러서 패턴 탓하는 거 아냐?'라는 질문을 던져 매일 나를 괴롭힌다. 오늘 병원에서 대기시간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. 

 

솔직히 신경 쓰기 싫다.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, 아빠가 걱정해 준다고 해서 내 걱정이 반으로 줄어들지도 않는다. 위로가 되지도 않고, 그게 응원이 되지도 않는다. 아빠는 좋은 아빠이지만 한 편으로는 잘 모르겠다. 물론 완벽한 사람은 없고, 내가 감히 아빠를 판단할 정도로 좋은 딸이었는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. 하지만 그냥 지금 내 기분은 그렇게 느끼고 있고, 그냥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다. 아빠가 하는 걱정이 나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. 그냥 모른 척해줬으면 좋겠다. 어릴 때 당연히 우리를 위해 경제활동을 하시느라 너무 바쁘셔서 품을 내주실 틈이 없으셨겠지만, 지금 와서 갑자기 품을 내주시는 게 나에겐 부담이 된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다.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고, 나는 그게 너무 갑작스럽고 부담스럽다는 것이 말이다. 그리고 말씀을 못 드렸지만 당신의 딸은 너무 예민해서 이런 것 하나하나가 지친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고 싶었다. 

 

오늘 아침에도 병원을 가는 중이었는데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. 아침밥을 먹자고 하신 전화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. 나는 병원을 다는 걸 말씀드리지 않아서 뭐라고 변명해야 하는가를 한참을 고민하다 받았다. 그리고 "밖이야 아빠" 한마디를 꺼냈고, 아빠는 "알겠어~"하고 끊어주셨다. 그 무관심이 너무 감사했다. 

 

 

 

 

2. 삶이 흐릿할 때, 그래도 낙관적이고 싶다. 

내가 ADHD를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의 시간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. 내 미래는 조금 다르다. 나는 당장 내일도 계획하기가 굉장히 어렵다. 그렇다 보니 순응해야 한다는 걸 안다. 남들보다 조금 느리고, 조금 더 많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수도 있고, 남들보다 더 덤벙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. 근데 아는데 너무 잘 아는데 이게 너무 어렵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너무나도 어렵다. 어제의 게으른 순간 하나하나 들이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 누적되어 나를 괴롭힌다. 그렇다고 해서 그 게을렀던 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. 왜 게을렀었지? 하면서 다시 그걸 까먹고 게으른 행동들을 또다시 반복한다. 사실 게으른 건지 예민해서 체력이 저하된 건지도 잘 모르겠다. 요즘은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. 예민해서 내가 비생산적이 된 건지..? 아니면 그냥 비생산적인데 예민한 것인지 말이다. 그리고 내일 하루도 계획하지 못하지만, 자책은 좀 줄였으면 좋겠다. 반성은 좋지만 나는 좀 심하다. 내가 생각해도 좀 경우가 심하다. 적당히 좀 하자. 

pixabay_ Pexels

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갯속에서도 나는 긍정적이고 싶다. 비관적인 사람에겐 마음마저 지옥이니까, 마음만큼은 좀 천국에 두고 싶다. 사실 마음만이라도 편했으면 좋겠다. 비관적이고 자책해서 될 게 없다는 것을 아니까, 그만 비관적인 굴레에 빨려 들어가고 싶다. 나도 모르는 무의식이 자꾸 나를 비관적인 생각의 소용돌이로 데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. 그냥 '어떻게든 잘 되겠지'하고 훌훌 털어버리고 싶다.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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